[전문가 기고] 고한읍(古汗邑) 18번가의 기적

육동한 강원연구원장 

 

 

산비탈 위용을 과시하는 리조트 건물들의 아래 골짜기. 한 읍내가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한때 인구 7만 명의 큰 도시였던 이곳은 지금은 5,0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입니다. 
탄광 경기가 한창일 무렵에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합니다만, 30년 전 석탄합리화사업이 시작되면서 아주 급속하게 쇠락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간신히 남아 있는 골목들 안에서는 화려했던 영화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녹음 짙은 초여름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입니다.


1995년에는 폐광지역개발특별법(이하 ‘폐특법’)이 제정되어 정선 등 4개 시·군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이 본격화됩니다. 이때 내국인 전용 카지노를 보유한 강원랜드도 만들어졌습니다. 그간 지역기반시설 확충 및 주거환경 개선, 대체산업 육성 등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었는데 그 투자 규모가 3조 원에 달합니다. 

 

그러나 일자리를 늘리겠다던 대체산업들이 대부분 부실화되었으며 중복투자와 단기성 사업이 반복되면서 이들 지역의 회생은 오히려 요원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구유출은 더 빨라지면서 이미 오래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간에 폐특법 시한은 두 번이나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 지역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한의 어느 한 골목에서는 작지만 기적과 다름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한 20개 마을 중 18번째 마을로 보통 ‘18번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한 여성 이장이 새벽마다 골목에 버려
진 담배꽁초를 줍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몇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노인의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여 예쁘게 바꾸었는데 이것이 주민들의 사고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지역에 정착한 젊은 활동가들이 본격적으로 마을을 돕기 시작하면서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노후주택 수리가 마을 전체로 이어지고 빈집들은 가게와 마을회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골목길에 놓인 꽃과 화분은 칙칙했던 동네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고 이는 마을의 활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비단 18번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옆 마을에는 골목의 테마인 각양각색 다육이 화분들이 담장 앞마다 놓여 있습니다. 고령의 주민들이 스스로 좁은 방에서 나오셔서 동네를 새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 골목길 정원박람회도 열린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18번가의 기적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고한읍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8번가에서는 흥미로운 도시재생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마을호텔 사업입니다. 이는 골목을 따라 늘어져 있는 민박, 식당, 세탁소, 카페들을 엮어 고객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옆으로만 긴 호텔입니다. 주민 모두가 호텔 주인이 되는 셈인데 이 일은 정부도 지원하고 있으며 이미 전국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 뒤에는 지역 공무원들의 열정과 헌신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고한 읍장은 군청으로 복귀도 마다하고 8년째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매일 골목을 누비고 있습니다. 야생화 축제를 일구고 독특한 골목구조를 활용해 추리마을도 만들고 있습니다. 마을에 필요한 사업들을 중앙과 도에서 하도 많이 가져와 뒤치다꺼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군청 담당과장이 엄살을 부립니다. 흔한 정부의 마을지원 사업들을 기계적으로 이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18번가의 성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민들의 자발성과 참여입니다. 그간 폐광지역 활성화를 위한 대규모 사업들이 대부분 하향식·관 주도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가장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성공 경험의 자연스러운 확산입니다. 일종의 나비효과입니다. 확산과 수용은 강요나 하향식 지원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른 기대일지 모르지만, 이는 지난 25년의 폐특법이 절대 이루지 못한 변화를 폐광지역 전체에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관의 역할에 대한 조명입니다. 고한읍은 주민들과 철저히 소통하면서 그들을 이끌기보다는 자발적인 활동을 뒤에서 적극 돕는 조력자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주민의 신뢰를 가득 확보하고 있습니다.

 

고한읍 18번가의 기적. 아직 더 가야 할 길과 넘을 언덕이 없지 않지만 이미 인구소멸시대 지역재생의 모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더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꽃은 ‘진정한 변화는 규모와 자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담고 여기저기 퍼져 나가리라 기대해봅니다.